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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문화재청)

 

 

 

 

- 보물 제507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 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삼층석탑 (無爲寺三層石塔) -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2007. 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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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08.29 16: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원효대사에 대한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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