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 석탑을 중심으로'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18.12.08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2. 2018.12.06 충남 서산 상왕산 보원사지
  3. 2018.12.05 강원 원주 영봉산 흥법사지
  4. 2018.12.04 강원 원주 법천사지
  5. 2018.12.03 강원 원주 현계산 거돈사지
  6. 2018.11.28 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7. 2018.11.27 보물 제435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8. 2018.11.26 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매산리석불입상
  9. 2018.11.26 보물 제77호 춘천 칠층석탑
  10. 2018.11.24 강원 홍천 물걸리사지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청)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야여래삼존상

2009.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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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상왕산 보원사지

 

충남 서산 상왕산 보원사지

 

 

 

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석조 (瑞山 普願寺址 石槽)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청)

 

 

 

 

 

 

 

 

충남 서산 상왕산 보원사지

2009.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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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영봉산 흥법사지

 

강원 원주 영봉산 흥법사지

 

 

 

보물 제463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청)

 

 

 

 

 

 

 

 

 

 

 

 

 

 

 

보물 제464호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原州 興法寺址 三層石塔)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흥법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거대한 사찰로, 원래 탑 외에도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강원 원주 영봉산 흥법사지

2009.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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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법천사지

 

강원 원주 법천사지

 

 

국보 제59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문화재청)

 

 

 

 

 

 

 

 

 

 

 

 

 

 

 

문화재자료 제20호 법천사지 당간지주 (法泉寺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거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법천사 절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당간의 받침돌이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작품으로, 기둥 형태가 안정감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강원 원주 법천사지

2009.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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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현계산 거돈사지

 

강원 원주 현계산 거돈사지

 

 

보물 제750호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

 

 

거돈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화재청)

 

 

 

 

 

 

 

 

 

 

 

 

 

 

강원 원주 거돈사지

2009.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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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안성죽산리삼층석탑 (安城竹山里三層石塔)

 

 

 

 

봉업사터 뒷편 비봉산 아래에 자리한 3층 석탑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혜소국사가 세운 탑으로 전하는데 지금은 이곳 동네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대상이 되고 있다.

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일부가 땅에 묻혀 탑의 완전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땅위로 드러난 모습은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윗돌을 괴는 곳에 연꽃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기둥모양을 새겼으며,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 하면서도 탑신의 1층 몸돌이 너무 높아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또한 기단 맨윗돌의 연꽃장식과 두꺼운 지붕돌, 4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2009. 0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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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35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435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奉業寺)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 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치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

 

 

 

 

 

 

 

 

 

 

 

 

시도유형문화재 제89호 안성죽산리당간지주 (安城竹山里幢竿支株)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일컫는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대사찰이었던 봉업사터에 안성죽산리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약 30m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원래 이곳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는데, 남쪽 돌기둥은 윗부분의 4분의 1정도가 이미 깨진 상태이다.

돌기둥은 표면이 거칠고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꼭대기의 바깥쪽 모서리를 둥글려 완만하게 다듬었다.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파놓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같은 시대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보물 제435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2009. 0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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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매산리석불입상

 

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매산리석불입상 (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안성에 있는 높이 3.9m의 보살상으로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높이 솟아 있는데,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부터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얼굴은 넙적하고 눈·코·입은 비례가 맞지 않아 독특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토속적인 얼굴은 높은 관과 더불어 보살상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에 비해서 체구는 작은 편이며 어깨는 둥글고 가슴은 듬직하게 처리되어 있다.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 옷은 다소 두꺼우며, 상체에는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간략한 주름이 표현되고,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양 손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해서 보이게 했으며 손가락을 구부려 멋을 부리고 있고,

왼손은 복부에서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다.

두 다리는 정면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데 다소 둔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한 편이다.

듬직하고 우람하게 표현된 이 거구의 보살상은 개태사 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등 고려 초기 석불상들과 함께 당시의 대표적인 석조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청)

 

 

 

 

 

 

 

 

 

 

 

 

 

 

 

안성시 향토유적 제20호 미륵당 오층석탑

 

미륵당내의 매산리 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화강암 재료의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가 각출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

단층기단은 네 귀에 우주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1석으로 조성된 갑석은 아랫면에 반전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불룩한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를 각출했다.

옥신과 옥개는 각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1층 옥신에는 양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2~4층의 옥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은 4층의 것이 결실되었고, 5층은 옥신·옥개석이 동일석이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 원호경사가 있으며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옥신괴임은 낮은 1단이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년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안성시청)

 

 

 

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매산리석불입상

2009. 0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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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77호 춘천 칠층석탑

 

보물 제77호 춘천 칠층석탑 (春川 七層石塔)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여,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문화재청)

 

 

 

 

 

 

 

 

 

 

 

 

 

 

 

 

 

보물 제77호 춘천 칠층석탑

2009.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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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홍천 물걸리사지

 

강원 홍천 물걸리사지

 

 

 

보물 제541호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洪川 物傑里 石造如來坐像)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소재의 대승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모양의 매듭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8세기 불상에 비해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어서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분된 8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8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파손으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장식성이 강조되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문화재청)

 

 

 

보물 제542호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洪川 物傑里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대승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외에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불대좌 및 광배 4기가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얼굴은 풍만하지만 턱이 뾰족하여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긴장감이나 탄력적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에까지 나타나 있으나 평행선으로 되어 약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 연화대좌로 상대·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 긴장감이 사라진 무겁고 해이한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문화재청)

 

 

보물 제543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대승사에 있는 이 불대좌(佛臺座)는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대좌는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구분이 뚜렷한데 현재 머리광배 부분은 없어졌으며, 안쪽에는 덩쿨무늬를,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표현하였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 대좌로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는 향로와 새 모양의 조각이 있는 8각의 받침돌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석이 놓여 있다.

중대에는 8개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그 안쪽에 머리광배를 갖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을 이루고 있는 상대는 연화좌로 3중의 연꽃이 조각되었는데, 연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세련된 이 불대좌는 물걸리에 보존되어 있는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홍천물걸리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등과 같은 절터에서 발견된 점과 조각수법 등에서 볼 때 다른 불상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보물 제544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 (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및 光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대승사에 있는 것으로, 불상은 없고 광배와 대좌만 남아 있다.

완전한 배(舟) 모양의 광배는 가운데에 연꽃무늬와 덩쿨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모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윗부분과 좌우 등 9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각기 손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광배를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는 3단으로 구성된 8각 모양이다.

맨 아래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각 면에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작은 귀꽃이 있다.

중간의 각 면에는 불상과 악귀를 쫓아준다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대좌의 맨 윗부분은 연꽃이 활짝 핀 반원형 모양이고 연꽃 안에 작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광배 및 대좌의 양식이 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것들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보물 제545호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洪川 物傑里 三層石塔)

 

 

물걸리 절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절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이전에는 이곳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세운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모서리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탑이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강원 홍천 물걸리사지

2009.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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